오는 4월 13일은 제20대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선거일입니다. 현재 대한민국 만 19세 이상의 모든 국민은 성별, 재산, 종교, 교육에 관계없이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자치 단체장 및 지방자치의회 의원 후보에 투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오늘날 같은 근대적 투표제도가 도입된 것은 100년도 채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투표의 역사를 살펴보면 원시 공동체 시대 종족회의를 통한 촌장 선출부터 백제의 상좌평 선거, 고구려의 대대로 선출, 조선시대의 세법 개정 찬반 투표까지 여러 투표제도가 존재했으나 그 권리가 일부 고위 관료나 남성에게만 주어지는 등 극히 제한적이었습니다. 오늘날 모든 국민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투표는 평등한 선거를 실현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 끝에 확립된 소중한 제도입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며 4월 ‘역사로 보는 인문학’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이뤄진 다양한 투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충남 부여군 호암리에는 정사암이라는 큰 바위가 있습니다. 백제시대, 이곳은 백제의 재상인 상좌평 선출이 이뤄지는 선거장소였습니다. 삼국시대 정치는 국왕 중심의 귀족연합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에 국가 중대사에 관한 결정을 내리거나 최고관직을 선출할 때는 귀족들의 의견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즉 상좌평 선출 제도는 귀족연합적 정치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상좌평 선출은 백제의 16관직 중 으뜸인 좌평들의 투표에 의해 3년에 한 번씩 선출되었는데, 후보자 3~4명의 이름이 적힌 밀지를 바위 위에 올려놓은 뒤 얼마 후 개봉했을 때 이름 위에 인장이 찍혀 있는 사람을 상좌평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최고 관직인 대대로 역시 귀족들의 투표를 통해 선발되었습니다. 대대로 선출은 고구려의 귀족회의인 제가회의를 통해 이뤄졌는데, 2013년 방송된 드라마 <칼과 꽃>에서는 대대로 후보 앞에 큰 저울을 놓고 대신들이 원하는 후보의 저울에 나무 패를 놓아 선출하는 투표장면을 연출해 고증된 투표 방식인지 호기심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한편 다섯 부족, 오가연합체로 이루어진 고구려는 대대로를 두고 부족간 치열한 분쟁이 벌어지기도 했는데요, 대대로 선발에 불복할 경우 전쟁에 가까운 무력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이 경우 국왕은 궁문을 걸어 잠그고 상황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다가 승리한 세력을 대대로로 인정했다고 합니다.

투표는 선거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가부를 결정할 때나 의사를 표시할 때도 투표가 이루어지죠. 전통 왕정시대인 조선시대, 하나의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 조선 최초 여론조사를 실시한 이가 있으니 바로 세종대왕입니다. 당시 조선시대의 세법은 토지등급을 3등급으로 나누고 관리가 직접 답사해 농사의 풍흉을 판단, 세금을 매겼는데 기준이 모호하고 객관적이지 못한 조사로 인해 불공평한 과세가 빈번했습니다. 때문에 세종은 억울하게 세금을 더 내는 백성이 없도록 토지 품질을 6등급으로, 풍흉에 따라 9등급까지 세분화하는 새로운 공법을 도입하려 했는데요 시행 전 백성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대대적인 여론조사를 시행했습니다. 이것이 1430년 시행된 국민투표입니다.

투표인원은 당시 조선 인구의 1/4에 달하는 17만 명이었으며 노비와 여자, 어린이를 제외하고 촌민과 상민, 양반에 고루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오늘날 같은 체계적인 프로세스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 투표는 관리들이 대상을 일일이 찾아가 찬반 의견을 묻고 답변을 기록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는데요 때문에 자그마치 5개월이란 기간이 소요되었다고 합니다.

투표 결과를 살펴보면 새로운 공법 시행에는 9만8,000여 명이 찬성했으며 7만4,000명이 반대한다고 응답했습니다. 지역별로는 전라도와 경상도가 크게 찬성하고 함길도와 평안도는 반대 의견이 많았는데 이는 두 지역의 농사 환경의 차가 크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기득권을 가진 양반 및 관리직은 90.2%가 반대했으며 촌민들은 57.1%가 찬성했습니다.

투표가 끝난 후 세종은 결과를 토대로 대신들과 오랜 시간 공법 개정에 대한 의견을 나눴는데요, 찬성이 많았던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시범 시행 후 3년 뒤 전국으로 확대했습니다. 공정한 과세를 통해 농민들의 부담은 줄어들고 경제는 성장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다양한 문화산업도 꽃피우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의견을 철저히 반영해 완성된 세종의 새로운 공법은 조선 과세의 기준이 되어 조선중기 경제 부흥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세계의 여성들이 투표권을 갖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1893년 뉴질랜드에서 최초로 여성 참정권을 허용한 후 세계 각국의 여성들은 한 장의 표를 행사하기 위해 오랜 투쟁을 벌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48년 5월 10일 진행된 대한민국 제1대 총선을 통해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 받았습니다. 이는 여성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 제헌국회의 의원을 직접 선출한 최초의 선거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깊습니다. 당시 참정에 대한 여성들의 열망을 참여율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투표권을 부여 받기 위해 선거사무소에 등록한 여성의 숫자가 전체의 89%에 달했다고 합니다.

한편 초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 후 선거법은 큰 개정 없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데요, 오늘날 당연하게 시행 중인 해외 부재자 투표제의 경우 1972년 유신헌법이 제정되며 한 차례 폐지된 적이 있습니다. 이는 당시 유신정권이 해외 한인사회의 반정부 성향을 우려한 나머지 ‘부재자 가운데 외국 거주 유권자는 제외한다’는 조항을 삽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외동포들의 지속적인 참정권 투쟁으로 40년 만에 부활, 2012년 제 19대 국회의원 및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재시행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근대 민주주의 투표사에 선거 무효라는 오점을 남긴 사례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3·15 부정선거입니다. 장기집권을 위해 수 차례 개헌해 3선에 성공한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은 4선 당선을 목표로 지방행정조직을 장악하는 지방자치법을 개정하는 한편 자유당후보의 득표율을 압도적으로 높이기 위해 4할 사전투표, 공개투표, 완장부대 활용, 야당참관인 축출 등의 부정행위를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부정행위와 개표조작으로 자유당 이승만과 이기붕의 득표율이 95~99%까지 육박하는 등 부정행위의 증거 및 결과들이 속속 드러나자 민주당은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전국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습니다. 이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결국 1960년 4월 이승만의 사임 발표와 함께 자유당이 붕괴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