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노로 인해 대거 소실된 한양도성. 김정호 수선전도(서울지도)

김정호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수선전도(서울지도)를 펼치면 한양을 둘러싼 거대한 성벽을 볼 수 있다. 1394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으로 천도한 뒤 축조한 한양도성은 지형을 따라 설계된 친자연적인 아름다운 구조와 수도를 방위하는 견고한 축성 기술 등으로 만리장성에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문화유산의 가치를 담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며 상당 구간이 훼손되고 말았다.

특히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의 도시개발을 이유로 이완용 등이 앞장서 도성 철거를 주장하자 600년 유구한 역사의 한양도성은 일부 산성에 위치한 성곽을 제외하고 모두 헐리고 말았다. (개중에는 1907년 일본 황태자가 서울을 방문할 당시, 천황의 핏줄이 보호국의 성문 아래를 지날 수 없으니 성곽을 헐어버렸다는 설까지 있다.) 다행히 1970년대 정부의 국방 유적 보존 및 정비 지시로 인해 약 70% 정도 복원된 한양도성은 지난 2012년 세계유산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다.

경매로 팔려버린 500년 역사 돈의문. 1904년 돈의문

한양도성이 축조될 당시 성벽의 동서남북에는 흥인지문과 숭례문, 돈의문, 숙정문 4대문이 설치되었는데, 흥인지문을 비롯해 3개 대문은 존재해 있는 반면 서쪽을 지키던 돈의문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돈의문 역시 일제의 도시개발로 인해 무참히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돈의문은 500년간 중국 사신과 왕래하던 대륙의 관문이었다. 그러나 1915년 일제는 전차 노선을 설치한다는 이유로 돈의문을 송두리째 해체했다.

뿐만 아니라 돈의문에 사용된 목재와 기와를 일반 경매에 부쳐 205원(약 521만 원)에 판매하는 만행까지 저지르고 만다. 오늘날 돈의문의 흔적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현판만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지난 2009년 서울시에서 돈의문 복원 계획을 발표했지만 언제 시행될지는 미지수이다. 현재 한양도성 4대문 중 조선시대의 기술로 제작되어 원형이 온전히 보존돼 있는 성문은 흥인지문만이 유일하다.

일제에 유린당한 서울 5대 고궁

서울투어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서울의 대표 관광지가 있다. 바로 5대 고궁이다.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으로 꼽히는 5대 고궁은 조선왕조 600년의 흔적과 왕실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그러나 서울 5대 고궁 역시 일제의 유린을 피해가지 못했다.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크게 훼손되었다가 조선 말 흥선대원군의 지휘 아래 새롭게 중건되었다. 하지만 왕실의 위엄을 높이기도 전에 명성황후가 살해되고, 일제에 의해 가장 큰 수모를 겪은 비운의 궁궐이 되고 말았다. 1926년 일제는 조선의 민중을 탄압하기 위해 경복궁 입구에 조선총독부를 세웠다. 뿐만 아니라 휴게실과 골프장 등 편의시설을 짓는다는 이유로 경회루를 비롯해 경복궁의 전각을 헐거나 위치를 바꾸는 등 훼손을 자행했다. 심지어 선대 임금의 어진을 모시던 선원전은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의 일부로 사용되었고, 동궁의 처소인 자선당은 일본으로 반출되기까지 했다. 이처럼 수많은 치욕을 겪던 경복궁은 1995년 조선총독부가 철거되고 대규모 복원공사를 마친 후 2010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었다.

일제의 유린은 경복궁에서 끝나지 않았다. 1483년 세조, 덕종, 예종의 거처를 위해 창건된 창경궁은 순종 즉위 후 궁 안의 모든 전각이 헐리고 일본식 동물원과 식물원이 설치된 데다 1911년에는 창경원으로 격하되기까지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이 들어서 있는 경운궁(덕수궁)은 고종황제가 정무를 보며 생활하던 우리나라의 첫 황궁이었다. 그러나 고종 승하 후 일제는 덕수궁을 둘로 갈라 돌담길을 뚫고, 궁궐 내 건물과 전각을 해체해 공원으로 만들어버렸다.
5대 고궁 중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돼 있는 것으로 알려진 창덕궁도 일제의 만행을 피해갈 수 없었다. 일제는 창덕궁 일부 전각을 헐어 일본 양식의 박물관을 건설했다. 광해군 때 창건되어 수많은 임금들의 임어를 거친 경희궁의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일제는 경희궁의 대부분 전각을 헐어버리고 궁궐 한복판에 방공호를 설치했으며 대부분의 터를 매각해 궁궐의 흔적조차 없애버렸다. 1988년 복원사업을 시작했지만 옛 경희궁의 위엄을 되찾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듯하다.

지방문화자료로 전락해버린 논개의 누각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왜장의 허리를 감싸 물속으로 뛰어든 진주의 관기 논개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을 함락시킨 왜군은 진주 남강 벼랑에 위치한 촉석루에서 연회를 펼쳤는데, 지금도 진주에 가면 촉석루와 함께 논개가 뛰어내린 의암이라는 바위를 볼 수 있다. 한편 촉석루는 1365년 공민왕 때 창건된 유서 깊은 문화재로 고려 때부터 진주성을 지켜온 지휘본부였다.

천여 년 가까이 진주를 지켜온 이 누각은 나라에 대한 충의와 공의를 상징해 국보의 가치를 인정받았으나 1950년, 6•25 전쟁에서 비행기의 폭격을 받아 그 원형이 대거 소실되는 바람에 문화재 등급 중 최하인 지방문화재 자료로 격하되고 말았다. 1960년 과거 자료를 바탕으로 복원했지만 촉석루는 아직까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8호에 불과하다. 다행히 최근 촉석루의 원형 부재인 대석과 돌계단 일부를 발견하고 설계도 역시 일부분 찾아낸 덕분에 촉석루의 국보 환원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