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이 곧 국가다.’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의 말처럼 절대왕정 시대, 왕의 존재는 그야말로 신과 같았습니다. 왕은 국가의 모든 권력을 손에 쥐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으며 말 한마디로 한 가문을 멸문할 수도, 살릴 수도 있는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왕이 신을 대변한다 여겨지던 이집트 같은 고대왕국에서는 왕 아래 모든 만물이 복종하는 것이 당연했으며 사소한 일이라도 왕과 연관된 것을 부정하는 일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반역과 같았습니다. 엄격한 신분제이던 과거, 왕은 그야말로 모두가 바라는 꿈의 자리였던 셈입니다. 때문에 모두가 존경하는 성군이라도 왕의 주변에는 늘 피바람이 도사릴 수밖에 없었는데요, 이번에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특히 피로 얼룩져 있던 몇몇 왕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겠습니다.

조선왕조에서 가장 많은 자식을 본 것은 세종으로 22명의 자녀를 두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많은 자녀들이 북적이며 화목하게 왕실을 이끌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지만 일부다처제인 조선왕실은 중전과 후궁 소생의 구분, 외척 등 세력으로 인한 갈등이 빈번했고, 때문에 형제가 많을수록 왕권에 대한 위협도 컸습니다.

조선 3대 임금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신진정객을 포섭하는 등 조선 개국에 일조했으나 태조가 후비 소생의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방석을 지지하던 정도전 등 세력을 제거, 방석마저 유배를 보내 죽여버립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1차 왕자의 난’입니다. 이후 동복형제인 방간이 왕위 계승에 대한 야망을 버리지 못하고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나 제압하고 태종은 조선 왕실의 세력을 완벽하게 장악합니다.

태종은 조선초 불안하던 왕권을 강화할 다양한 정책들을 펼쳤는데요, 왕권에 가장 큰 위협이 되던 사병을 혁파하고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시키는 한편 권력가의 세력 약화를 위해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해 세가 노비의 쟁송을 관할했습니다. 한편 정무와 군정을 분리하고 세금 제도 정비, 신문고 등을 설치해 국정과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힘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노력해도 불구하고 옥좌를 둘러싼 피의 비극이 또 다시 발생했으니 바로 계유정난입니다. 계유정난을 일으킨 세조는 예부터 기세가 드세고 야망이 컸다고 합니다. 12세의 어린 왕 단종이 즉위하자 궁궐어른을 자처하는 세조, 안평대군 등의 왕족들과 재상 정치를 노리는 대신, 어린 임금을 보호하려는 학자 등으로 조정은 혼돈을 이루는데요, 자신의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세조는 자신을 견제하는 안평대군 등의 세력들을 완벽히 제거하기 위해 한명회, 신숙주, 홍달손 등과 함께 거사를 시행합니다. 이로써 김종서, 황보인 등이 목숨을 잃고 안평대군은 유배 후 사사되었지요.

피의 거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세조가 왕으로 등극하고 단종은 상왕으로 물러났는데 성삼문, 하위지 등 일명 사육신이 단종복위사건을 계획하다 발각되자 세조는 단종을 영월 청령포에 유폐시킵니다. 이후 또 다시 단종복위사건이 일어나자 그를 죽이는데 일설에 따르면 관원의 활시위에 목이 졸려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합니다.

한편 세조는 <관상>, <공주의 남자> 등 미디어 콘텐츠에서 주로 형제의 피를 묻힌 잔혹한 임금으로 그려졌으나 사실 호적•호폐제 강화, 전국 방위 체제 편성, 직전법 실시 등 놀라운 치적을 남긴 군주이기도 합니다.

연산군은 로마의 네로와 비교될 정도로 조선 최악의 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엄청난 인명을 살해하고, 자신의 할머니를 머리로 들이받고 큰어머니를 강간하는 패륜을 저질렀으며, 사치와 향락으로 국가 재정을 거덜 내고도 백성들의 혈세를 쥐어짠 반인륜적인 임금이었지요. 연산군이 처음부터 폭군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등극 후 4년 동안은 전국에 암행어사를 파견해 민간의 동정을 파악하고 부패관료를 척결하는 등 민생을 살필 줄 아는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사건건 간언을 올리는 관료들과의 갈등, 어린 시절 어머니의 부재로 갖게 된 트라우마 등 다양한 문제들이 불거지며 조정관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쌓였고, 1498년 무오사화(김일손 등 사림세력이 유자광, 이극돈의 상소로 인해 화를 입은 사건)를 통해 자신의 대립세력을 제거하고 조정을 장악한 연산군은 폭군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궁궐에는 화려한 잔치와 기생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점점 줄어드는 국고를 채우기 위해 백성들의 세금은 더욱 무거워졌습니다. 여기에 천하의 간신 임사홍이 생모 폐비윤씨의 죽음을 밀고하며 관련자들을 모두 척살하는 대살생극 갑자사화가 일어난 것이지요. 그간 많은 사극에서 갑자사화를 어머니에 대한 복수극으로 그렸지만 갑자사화는 사실 모든 권력을 손에 넣고 절대적인 왕권을 행사하기 위한 연산군과 임사홍의 의도된 참살극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완연한 폭군으로 변모한 연산군은 각종 패륜과 폭정을 일삼았습니다. 사간원, 홍문관을 없애고 성균관을 연회장으로 바꿔버리는 한편 사냥을 위해 인근 민가 수십 채를 강제 철거하고 어염집 아낙부터 자신의 큰어머니까지 겁탈했습니다. 연산군의 포악함이 점점 심해지자 각지에서 반정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고 1506년 진성대군을 옹립한 중종반정이 성공하며 연산군은 왕위에서 폐출되었습니다.

한편 연산군의 광적인 행적과 그 원인을 또 다른 시선으로 재해석한 각종 영화, 드라마들이 제작되며 연산군의 폭정을 왕권강화의 일책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과 그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동정하는 의견들도 제시되고 있는데요, 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의 저자 박영규 작가는 ‘왕권 강화는 백성과 신하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닌 왕이 백성과 신하를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체 역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일축했습니다.

모든 권력을 손에 쥔 왕은 뛰어난 통치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행여 역량이 부족해도 자신의 미흡함을 인정하며 신하의 의견을 귀담아 들을 줄만 알아도 존경하는 리더로 이름을 남길 수 있지요. 여기에서 조금만 엇나가도 무능의 대명사로 낙인 찍히게 되는 것이 왕입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선 14대 왕인 선조입니다.

선조가 즉위했을 때 조선은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악정으로 조정은 어수선하고 민심은 피폐해진 상황이었습니다. 선조는 퇴계 이황과 기묘사화로 정계에 물러나 있던 사림명사들을 대거 등용해 조정을 안정을 꾀했고 이는 성공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기득권을 차지한 사림이 김효원과 신의겸을 축으로 권력 다툼을 벌이며 분당,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자 오랜 시간 조선 정계를 괴롭힌 당파싸움이 시작됩니다. 당파싸움의 원인에는 선조의 괴팍한 성정도 한몫 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일부 관료들은 ‘선조 임금 아래에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 ‘임금이 시기심이 많고 모질며 고집이 세다’고 비판했습니다.

임금까지 합세해 더욱 거세진 당파싸움은 임진왜란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정권 다툼으로 인해 국방에 소홀하자 국력은 쇠약해지고 조선을 넘보는 이민족과 왜인들이 늘어났습니다.

결정적으로 1590년 왜의 동태를 살피고 온 동인 김성일과 서인 황윤길이 서로 상반된 보고를 했는데, 황윤길은 ‘왜국이 전쟁 준비에 한창이니 우리도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보고한 반면 김성일은 ‘도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 것 없으므로 민심만 혼란케 할 전쟁 준비는 하지 않는 게 좋다’고 말했습니다. 황당하게도 선조는 당시 우세했던 동인 세력의 의견을 따라 전란에 대비하지 않았고 그 결과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납니다.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은 조선은 부산, 충주, 한양, 개성, 평양 순으로 함락되어갔습니다. 여기서 선조는 또 한번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데요, 광해군, 의병, 이순신 등 백성들이 왜에 맞서고 있을 때 그는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당시 선조에 대한 백성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경복궁, 창경궁을 방화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더욱이 의병을 통솔하며 왜와 싸우던 광해군에게 선위를 번복하며 마음을 어지럽히고, 붕당의 계책과 왜의 꾀에 휘말려 선전 중이던 이순신에게 무리한 출정 명령을 내렸다가 그가 거부하자 파직시키는 등 평정심을 잃고 전란 중 군주가 삼가야 할 실망스러운 모습을 수 차례 보여주었습니다.

임진왜란은 1958년 도요토미가 병사하며 끝이 났지만 7년간 전란에 시달린 조선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선조는 피해를 복구하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하지만 이미 잃어버린 백성들의 신뢰는 쉬이 되찾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 ‘역사로 보는 인문학’ 1월호에서는 ‘선조와 광해군’의 비극에 대해 다룬 적이 있는데요, 선조는 후궁 소생의 방계 출신입니다. 때문에 정실에게서 태어난 적자가 보위를 잇기를 강렬히 소망했는데 이는 결국 그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광해군 역시 패륜을 이유로 폐위 당하는 비극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는 친청을 기반으로 한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파하고 명과의 사대주의를 고집했습니다. 그 결과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이야기일 겁니다.

선조가 신하들의 말에 조금 더 귀를 기울이고 정세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었다면, 자신의 출생에 열등감을 갖지 않았더라면 임진왜란은 물론 병자호란의 비극까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