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부자라고 하면 보통 다정한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아버지와 아들은 한 집안을 이끌어가는 가장과 그의 후계자라는 위치에서 누구보다 엄하고 냉담한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이란 존재는 자신의 뒤를 이어 가문을 이끌어가야 하는 또 다른 자신인 셈이니까요. (심지어 신화시대에서는 아버지를 공격하고 아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식을 잡아먹는 크로노스나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까지 등장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비극은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유교의 덕목인 효 사상을 받들던 시대에도 불구하고 갈등을 견뎌내지 못한 나머지 패륜과 같은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 부자들도 많습니다. 스카이즈 신설코너 ‘역사로 보는 인문학’ 그 첫 번째 시간에는 조선 왕조사상 가장 비극적인 부자로 손꼽히는 세 임금과 아들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조선왕조에서 묘호를 받지 못한 두 임금이 있으니 연산군과 광해군입니다. 폭군 연산군과 달리 광해군은 중립외교와 대동법을 시행하고 왜란 후 어지러운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한 다양한 정책들을 펼쳤으나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시키고 형제인 영창대군과 임해군을 죽인 패륜 왕이라는 이유로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되었습니다.(물론 이는 구실 중 하나에 불과하며 실질적으로는 광해군과 사대부의 정치적 이념의 대립이 원인. 때문에 인조의 쿠데타로 규정하는 시선도 있음.) 광해군이 이처럼 냉정한 숙청을 하게 된 데에는 임금으로서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다양한 세력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선조가 있었습니다.

선조는 중종의 서손입니다. 방계로 승통한 탓에 그는 자신의 후계자는 정실에게서 태어난 적자이길 바랐지만 정실인 의인왕후에게선 자식이 태어나지 않았고 후궁인 공빈 김씨로부터 임해군과 광해군이 태어났습니다. 두 아들이 장성할 때까지 세자책봉을 미루던 선조는 당시 발생한 임진왜란으로 인해 결국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 분조한 뒤 평양으로 도망쳤습니다. 장자인 임해군을 두고 차남인 광해군이 이례적으로 세자에 책봉된 것은 임해군의 성정이 난폭해 제왕의 자질이 없다는 대신들의 주장 때문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세자에 책봉된 광해군은 국가 안위를 위한 노력을 펼치며 민심을 수습해갔습니다.

여기서 일단락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당시 조선은 세자를 책봉하면 명나라에 보고 후 고명을 받아야 정식으로 세자로 인정받았는데, 명은 장자인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로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거절했습니다.

이처럼 불안정한 상황에서 계비인 인목왕후로부터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광해군의 입지는 더욱 불안해졌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선조는 공공연히 대신들에게 ‘영창대군을 잘 부탁한다’는 당부를 내렸는데 그 사실이 광해군의 불안을 더욱 가중시켰습니다.

결국 선조가 병으로 사망하고 어렵사리 왕위에 올랐지만 형인 임해군은 ‘왕위를 도둑맞았다’며 광해군을 비방했고, 광해군과 대립해 있던 소북파는 영창대군을 옹립했습니다. 결국 광해군은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을 숙청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패륜의 비극이 시작된 것입니다.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의 저자 박영규는 태종, 세조 역시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은 종친이라도 제거했으며 인조반정으로 인해 조선은 중국과의 군신 관계를 청산하지 못하고 병자호란의 굴욕을 겪게 되었다고 한탄했는데요, 더 시간을 되돌려 선조가 적통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광해군을 인정했다면 패륜은 물론 병자호란의 비극까지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은 뒤 조선과 청나라는 군신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인조의 장성한 두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도 청나라 심양으로 잡혀가 9년간 인질 생활을 하게 되는데요, 봉림대군은 아버지에게 굴욕을 선사한 청나라에 복수의 칼날을 가는 반청주의자가 된 반면 소현세자는 청나라 고위인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청과 조선의 문제를 원활하게 해결하고 서양의 천문학, 수학 등을 적극 받아들이며 외교관으로서의 활약을 펼칩니다. 뿐만 아니라 세자빈 강씨는 유목민족인 청나라 사람들이 농사기술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조선에서 노예로 잡혀온 사람들을 동원해 농사를 지어 청나라를 상대로 무역을 펼쳤습니다. 그렇게 많은 재산을 축적하고 조선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는 심양을 중심으로 조선사람들에게 두터운 인망을 쌓아갔습니다. 이것이 비극의 시작이었습니다.

광해군을 내쫓고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만큼 인조 역시 자신의 왕권에 많은 불안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오랑캐라 얕잡아보던 적국에게 두 번의 침입을 당하고, 민생은 피폐해지고 무릎을 꿇는 굴욕까지 겪었으니 청나라에 대한 인조의 증오는 상상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이 친청 행위를 하며 그들에게 신뢰와 인정까지 받고 있으니 인조가 소현세자를 달가워 할 리 없었습니다. 9년의 인질 생활을 끝내고 소현세자가 돌아왔지만 인조는 그를 문전 박대했다고 합니다. 일설에는 소현세자가 벼루를 비롯해 청에서 가져온 서양문물을 아버지에게 바치자 분개한 인조가 벼루를 그의 머리에 던져 시름시름 병을 앓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당시 인조 곁에는 귀인 조씨라는 후궁이 있었는데 세자빈과 사이가 좋지 않던 그녀의 이간질로 소현세자와 인조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귀국 후 2달 뒤 소현세자는 갑자기 병으로 쓰러져 3일 만에 사망했는데요, 온 몸에서 피를 쏟아내고 피부는 새까맣게 변색된 끔찍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를 두고 인조가 그의 죽음에 개입했을 거라고 추측하는데, 임금이나 세자의 병을 진료하는 의원은 상전이 사망할 경우 사형이나 귀양을 떠나는데 당시 소현세자를 담당한 의원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 첫 번째 이유이며 두 번째로 소현세자의 아들을 두고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는 점, 세 번째로 세자빈 강씨와 그의 아들들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귀양가 죽임을 당했다는 점입니다.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조선에 병자호란의 굴욕을 선사한 것으로도 모자라 열등감에 아들까지 죽인 못난 임금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조선의 발전 가능성을 두 차례나 막아버렸다는 점에서 동정할 필요성도 느껴지지 않는 최악의 군주지요. 한편 2013년 JTBC에서는 후궁 귀인 조씨를 주인공으로 궁중 암투를 다룬 드라마 <꽃들의 전쟁>을 방영했는데요, 극중 인조는 여전히 후궁의 치마폭에 휘둘리는 무능한 임금으로 그려지지만 그나마 아들부부에게 연민을 느끼는 인간적인 면모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한 번쯤 인조를 이해해보려는 이들에게 추천하는 작품입니다.

아버지로 인해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세자 사도. 영조 나이 40세에 얻은 귀한 아들인 사도가 아버지로 인해 비참한 죽임을 당하게 된 원인을 알기 위해선 영조의 선왕인 숙종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의 숙빈 최씨의 소생으로 병약한 경종이 보위에 오른 지 5년도 채 되지 않아 절명하자 21대 임금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과 영조를 지지하는 노론의 치열한 당쟁이 있었고 이로 인해 생명의 위협까지 받으며 어렵사리 재위한 영조는 탕평책을 펼치며 조정을 타평 정국으로 이끌어갑니다.(당시 영조에게 반한 김일경이 그를 ‘나리’라 칭하며 조롱한 일화는 유명하죠.) 이 같은 고난과 모욕까지 견뎌내며 어렵사리 오른 왕위인 만큼 영조는 군왕에게 어울리는 재량과 덕목을 중요시해고 이는 2세에 세자 책봉된 사도에게 그대로 강요되었습니다.

사도세자는 3세에 효경을 외우고 7세 때 동몽선습을 독파할 정도로 총명했다고 합니다. 비단은 사치라며 무명을 선택할 정도로 판단력도 있었고 서예와 그림에도 능통했습니다. 특히 사도세자는 무인적 기질이 강했는데 10세 무렵부터 학문보다 무예에 관심을 보이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영조는 매월 초 그간 학습한 내용을 기록해 자신이 볼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영조의 엄격한 제왕 교육은 사도에게 점점 부담으로 다가왔습니다. 영조 앞에서만 서면 절로 목소리가 작아지고 몸이 떨릴 정도로 아버지를 어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1749년 사도 15세에 접한 대리청정은 부자 갈등의 기폭제가 되고 맙니다. 당시 조정은 오랜 탕평 정국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당파들이 정권을 독점하기 위해 사도세자를 이용한 것입니다. 사도세자의 반대파인 노론과 정순왕후도 사도가 다시 붕당 정국을 불러오려 한다며 영조에게 무고하고 이간질했습니다.

이에 영조는 수시로 사도세자를 불러 질책했는데, 이로 인해 사도는 점점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증상 중 하나가 의대증(옷 입기를 싫어하는 강박증)이라는 병인데 사도가 영조를 알현하기 싫어 옷을 입지 않으려고 한 나머지 괴팍한 이상 행동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로 인해 사도는 궁비(궁궐의 계집종)와 내시를 죽이고 부왕을 두려워하며 늘 불안하고 초조한 일상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정신이상 증세가 극에 달하고, 여승을 입궁시키거나 왕궁을 빠져나가 관서 지역을 유람하는 등 돌발행동이 계속되자 당시 정순왕후 아버지 김한구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허물 10여 가지를 적은 상소를 올렸습니다. 사도를 죽음으로 몰고 간 비극의 원흉이죠.

분개한 영조는 사도에게 자결을 명하는데요, 이를 거부하자 뒤주에 가둬 아들을 죽이게 된 것입니다. 일설에 따르면 사도는 굴을 판 뒤 그 안에 커다란 뒤주를 놓고 들어가 마음의 안정을 취했다고 하는데요, 사도가 자결하라는 어명을 따르지 않자 뒤주를 잠가버리고 그대로 굶겨 죽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왕위에 대한 정통성을 군왕에 대한 완벽함으로 인정받으려고 했던 영조, 권력을 탐한 나머지 추악한 모략과 중상을 펼친 세력들… 그 틈에서 쓸쓸히 눈을 감고 만 사도는 철저한 희생자였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영조가 엄격한 부왕뿐만 아니라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으로도 사도를 감싸주었다면 이들의 비극적인 운명은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사도세자가 그린 것으로 추측되는 고궁회화 186번이 더욱 처연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인지 모릅니다.

고궁회화 186번이란?
강아지가 어미에게 달려가지만 어미가 귀찮다는 듯 외면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그림. 사도세자가 영조로부터 사랑 받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