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이벤트 의견제안
 
Home > 우리들의 이야기 > 만나고 싶었습니다
이영재 부장은 원주의 보수적 가문에서 자랐다. 그런데 그의 끼는 항상 집안의 가풍을 거슬렀다. 공부는 뒷전에 두고 그림과 음악, 운동으로 학창시절을 보냈다. 중학교 때부터 그림을 그렸고 기타는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자마자 시작했다. 그가 고등학교 2학년때는 ‘제50회 전국체전’에서 펜싱부문에 강원도 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딸 만큼 촉망받던 선수이기도 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그것이 못마땅했다. 공부를 해서 대학을 나오고 반듯한 직장을 갖기를 원했다. 결국 집안의 반대로 좋아하던 운동을 포기하고 기계공학과에 들어갔다.

대학에 입학을 하고는 좋아하던 운동은 포기했지만 좋아하는 노래와 기타는 원없이 즐길 수 있었다. 그 시절을 대표하는 문화코드가 ‘장발’, ‘통기타’, ‘생맥주’였다면 그것들은 이영재 부장에게도 역시 젊은 시절 ‘놀던 물’이기도 하다. 기타를 치는 동아리에 가입하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며 자선공연을 하고 노래를 부르고 기타를 연주했다. 그가 다니던 인하대학교 캠퍼스에서 영재의 기타가락에 막걸리 한잔 안마셨다면 간첩일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날 영장이 나왔다. 군대 가기 전 춘천에 있는 한 친구를 찾아 갔다. 그때 친구는 사귀던 애인을 데리고 나왔고 그 옆에는 또 다른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기타 하나는 기가 찼던 영재의 기타 가락이 소양강을 타고 춘천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온 날나리 대학생의 기타 실력과 노래에 반한 그 여인의 마음도 흔들렸다. 그 후 그 여인은 군대에 간 이영재 부장을 3년 동안 오매불망 기다렸다. 결국 둘은 이부장이 대학 4학년 때 서울의 ‘종로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영재 부장은 86년 우리 회사에 입사를 했다. 우리 회사가 종로예식장 건물로 사옥을 옮긴 바로 그 해다. 춘천에서 처음 만난 여인과 결혼을 했던 종로예식장이 이제는 새로운 직장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들과 딸이 다 커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잡을 때까지 그는 SK건설을 떠나지 않았다. 이영재 부장은 그래서 우리회사가 고맙다. SK건설은 그가 사랑을 이루고 가정을 꾸릴 수 있었던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이영재 부장은 현재 5200만불 규모의 아킬레이트 생산시설 공사 PM을 맡고 있다. 올들어 우리회사가 루마니아에서 수주한 두건의 공사 중 하나다. 루마니아에서의 플랜트 건설은 우리나라 건설사상 최초고 이영재 부장은 루마니아 플랜트 건설현장 우리나라 최초 프로젝트 매니저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치르는 전쟁은 앞으로 낯선 땅 루마니아에서 건설공사를 하고자 하는 모든 업체의 기준이고 표준이 된다.

집에서 기타를 종종 친다는 말에 그때가 주로 언제냐고 묻자 이영재 부장은 ‘노래를 부르고 싶을 때...’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에 얼마 전 그는 홍대 미대 교수로부터 그림지도를 받았다.

“그림이나 음악을 직업으로 가지고 살았더라면 지금 난 아마 그 짓을 못하고 있을 수도 있었죠. 오히려 다시 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지금이 훨씬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이영재 부장의 딴따라 기질은 그렇게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mailto